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아무튼, 민트사탕

나는 민트 사탕의 팬이다. 사춘기 시절 또래 친구들은 한창 아이돌에 빠져 거금을 쓸 때, 난 민트 사탕에 그 열정을 돌렸다.

누군가는 민트 사탕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들으면 유치하다며 코웃음을 칠수도 있지만, 뚜렷하게 자신의 기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은

칭찬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.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겪고 성장하면서 좋고 싫음에 대해 솔직하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들기 때문이다.

민트 사탕을 시작한 건 수학학원이다. 기름 냄새 풍기는 난로 한 대를 강의실 중앙에 켜두었던 수학학원에서, 뚱뚱한 패딩을 턱 끝까지 잠가 입고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. 그 패딩은 풀기 싫은 수학 문제를 더 풀기 어렵도록 만들었다. 몸은 따뜻한데 발은 추웠던 강의실의 온도 불균형은 잠이 많던 사춘기 아이를 더욱 졸리게 했다. 손에 쥔 샤프가 현대식 상형문자를 남발하고 있을 때쯤, 수학 선생님이 페퍼민트향 사탕을 건네어 주셨고, 한 알의 매콤함에 문제집 두 장을 풀었다. 효과가 떨어져 다시 상형문자를 그릴 때마다 선생님은 몇 번이고 민트 사탕을 주셨다.

 

결국 나는 중독되고 말았다. 입안을 개운하게 해주는 알싸하고 시원한 박하향과 은은한 달콤함이 옅은 흔적으로 남는 맛에 중독되고 말았다. 단짠단짠의 멈출 수 없는 중독성처럼, 민트 사탕 역시 시원함과 달콤함의 반복으로 내 입안을 끊임없이 파도 치게 한다. 평범한 사람들은 민트 사탕이 녹을 때까지 입에 물고 있지만, 고수는 다르다. 고수는 민트 사탕을 씹어 먹는다. 바스러진 민트 사탕의 식감은 파삭파삭하면서도 까끌까끌한 게 먹는 재미가 있다. 부서진 입자를 씹어먹을 때마다 새어 나오는 민트향은 입안에서 나를 더욱 재밌게 만들어 준다.

 

식감 때문만이 아니라 민트 사탕을 깨무는 그 순간만큼은 다른 세계가 열린다. 답답했던 교실에서도, 걱정이 태산일 때에도, 기분이 안 좋은 날에도. 언제 어디서든 민트 사탕 한 알을 깨물면 부정성을 잠깐이나마 날려주고 시원한 숨을 불어 넣어준다. 그 찰나를 지속하기 위해 나는 잇달아 민트 사탕을 씹어 온 것이다. 그렇게 점점 내 1일 민트 섭취량은 적정량을 한참 넘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.

 

엄마는 미처 알지 못했을 것이다. 그녀가 사왔던 1000개짜리 민트 사탕 1봉을 딸아이가 2주만에 다 먹어 치울 줄은. 심각성을 깨달은 엄마는 어느 날 다시 한번 같은 제품을 사와 매일 낱개로 20개씩 내게 배급을 했다. 그리고 나머지 사탕은 그녀 자신 말고는 아무도 모를 집 안 어딘가 꽁꽁 숨겨두었고,숨 막히는 민트 수색이 시작됐다. 민트 창고를 찾기 위해 사흘 동안 온 집안을 뒤졌다. 수색 3일째 날. 뚜껑이 열리는 피아노 의자 안이 민트 창고였음을 발견하였고, 그날부로 주도면밀히 사탕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. 일주일 후 여느 때처럼 딸의 간식을 챙겨주려던 엄마는 문득 납작해져 버린 봉지의 두께감을 알아차렸고, 그 속엔 빈껍데기들만 남아있음을 깨달았다. 그러나 이미 사탕은 내 뱃속에 몽땅 설탕으로 녹아 흡수되어버렸기에 되돌릴 수 없었다. 엄마의 허탈한 웃음이 집 안의 소리 공백을 채웠고 그 날 이후로 난 슈퍼의 사탕 코너 근처는 얼씬도 못하게 되었다.

 

민트 사탕은 나 ‘김선영'이라는 사람의 증명이다. 어릴 때는 좋아하는 숫자, 요일, 색깔, 동물 등을 말해보라고 하면 구구단 공식을 외우는 것처럼 술술 읊을 수 있었지만, 어른이 되어서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. 인생을 살아가는데 크게 중요하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개인의 취향이 흐려졌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. 그렇기에 민트사탕은 ‘김선영'이 뚜렷한 자신만의 취향이 있는 사람임을, 또 온 마음을 다해 무언가를 미친듯이 좋아하고 노력할 수 있는 재능이 있음을 증명해 준다. 취향이 있고 열정이 있는 사람은 다채로운 삶을 살아 결국 인생 전반의 양감을 두껍게 만든다. 난 그런 삶이 좋고 그래서 민트 사탕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안심했으며 앞으로도 마음껏 좋아하기로 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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